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밀양여행]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載藥山)에 사명대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 / 밀양시의 8경

경상도

by 화천비타민나무 2013. 7. 29. 09:00

본문

반응형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表忠祠(표충사)와 표충서원이 경내에 위치하여 있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初丁日(첫번째 丁자일)에 밀양시와 지역의 유생들과 함께 전통적인 예를 다하여 享祀(향사)를 올리고 있는 호국의 근본 도량인 만큼 전통적인 밀양시의 8경과 3대 신비와 함께 표충사는 구국의 정신이 고스란히 보존된 호국역사의 고향입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654년(진덕여왕8년, 무열왕元년)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654년 창건하고 죽림사(竹林寺, 竹園精舍)라 했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고승인 황면(黃面)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 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했다.

서기 829년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되어 왕이 친히 찾아와 크게 칭송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 유수와 산초가 모두 약수요, 약초아님이 없습니다."라 말하니 왕이 기뻐하고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載藥山 靈井寺)라 명명하고 절을 크게 부흥 시켰다.

 

 

중요문화재로는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 : 국보 제75호)·3층석탑(보물 제467호)·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酬忠樓(수충루)를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사천왕문 사이로 경내가 살며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수충루는 밀양시 교동에 있는 밀양향교 풍화루와 부북면 후사포리에 소재한 예림서원 독서루와 더불어 다른 사찰에서 볼 수없는 서원의 정문 형태로 된 누각이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도와 의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를 구하고자 서생포 가등청정의 적진으로 네차례나 회담을 하기 위해 들어 갔고 1597 정유년 외장 가등청정이 "조선에 국보가 있느냐?"고 묻자 "가등청정 당신의 목이 바로 조선민족의 국보다."하고 할을 하며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산사에 들어 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줄로 늘어 서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주문에 들어 설때는 오직 일심으로 불법에 귀의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하나로 모아 진리로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표충사의 중문격인 수충루는 중층 건물로 누각 아래에 문을 설치하여 진입공간을 마련하였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최근에 건립되었다. 누각의 중앙칸에는 ‘表忠寺(표충사)’ 편액을 걸고,

 

좌우칸에는 호국성사의 충혼을 상징하는 ‘수충루(酬忠樓)’라는 편액을 걸고 있다.

 

 

1604년 2월에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국서를 받들고 8월 일본으로 탐적사(강화정사)로 가서 8개월 동안 각고의 노력끝에 포로로 잡혀간 동포 3,000여명과 함께 귀국하는 등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그 해 6월에 선조에게 복명하니 가의대부(嘉義大夫) 영의정을 하사 받았으나 3일 만에 관직을 사양하고 그 해 10월에서야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영정에 분향 참배하고 다시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결가부좌한 채 무량선정에 들다가 광해군 2년(1610) 열반에 드시니 법랍 51년 세수 67세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다.

당시 조정에서는 국장으로 장례를 지내고 밀양 표충사(祠)와 묘향산 수충사(祠)에 서원 편액을 내리며 유교식 제향으로 봉행토록 했습니다.

 

숭유억불 조선시대의 당시 사회로서는 승려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였던 것이다. 또한 사명대사가 태어났던 밀양 무안면에 표충사당과 표충비 이를 수호할 표충사를 지었다.

그 후 오랫동안 당쟁으로 조선의 중신들은 구국의 영혼인 삼대성사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1839년(헌종5년)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당 천유(月坡堂 天有)선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예조에 소청을 올리면서 무안면에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그 당시 폐사로 있었던 영정사 경내로 사당과 서원을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변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중앙에 사명대사 동쪽에는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서쪽에는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800 의승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기허당의 영정을 함께 모심으로 삼대성사를 추모하는 서원이면서 그 관리와 제향을 사찰에서 맡는 유불의 이원적 구조로서 불교의 호국사상과 중생구제사상 그리고 유교사상의 의(義)와 공존하게 되므로 표충사(寺) 안에는 표충사(祠)와 표충서원이 있게 되었으며, 본사인 통도사와 더불어 동부 경남을 대표하는 명산 대찰인 것이다.

 

고려 문종대(1047~82)에는 당대의 고승인 혜린(惠燐)이 이곳에서 수도했고,

충렬왕대(1275~1308)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보각국존 일연스님이

주석하고 천의국사가 대를 이어 주석하면서 불법을 크게 중흥하니

1286년 충렬왕이 '동방제일선찰'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대광전(大殿光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대광전(大光殿)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준말로 표충사의 큰 법당이다. 앞면 5칸,

외3포 내3포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인 1929복원하였다.
앞면 돌계단 소맷돌의 조각, 잘 다듬은 주초석, 용마루 중앙과 추녀마루 장식이 돋보인다.

법당내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깊이 신앙되어온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동쪽 벽면에는 아미타 삼존도가 봉안되어있는데 가로 145mm 세로 226mm로 1885년(고종22)에 그렸다.

연화대좌에 선 삼존은 모두 단순한 원형 두광을 지니고 정면을 향하고 있다.
외벽에는 경전 속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이 중에 자동차가 있어 이채롭다고 할 수 있다.

 

 

 

대광전을 바라보며 마주하여 자리잡은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 중심법당인 대광전으로 들어서는 중문으로 최근까지 우화루 앞으로 진입로가 있었으나, 근래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진입로가 바뀌었다.

우화루는 야외참선 장소로 쓰인 곳이며, 우화루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남계천 맑은 물이 발아래 깔린다.

 

 

대광전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팔상전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http://pyochungsa.or.kr

표충사

경남 밀양시 단장면

055-352-115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