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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여행]영천가볼만한곳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임고서원

경상도

by 화천비타민나무 2012. 10. 27.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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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서원 (臨皐書院.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21필)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이 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문화재청 자료)

나의 조상이자 뿌리인 할아버지를 만나는 길 ..

 

매번 종친모임 이나 큰 행사는 용인에서 하시길래

그곳에 모든것이 다 있는 줄 알았더니..아니였더라..

경상도 영천의 임고서원에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내가 참..무지함이 컸다는 사실..ㅠㅠ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송탑비(頌塔碑)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송탑비(頌塔碑)의 전면 글씨는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 중에 집자(集子)를 하였으며,

 후면에는 조선시대 어제어필(御製御筆) 시(詩)를 각자(刻字)하였다. 

 

 

숙종대왕(肅宗大王, 1661~1720) 

조선 제1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674년~1720년이다.  

절의천추고(節義千秋高 : 절의가 천추에 높으니) 

평생아경중(平生我敬重 : 평생에 내가 존중하도다.) 

열조누포숭(列朝屢褒崇 : 열조께서 여러 번 포숭하였거니와) 

사림숙부용(士林孰不聳 : 사림의 누구인들 높이지 않으리오.)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1776) 

조선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725년~1776년이다. 

도덕정충긍만고(道德精忠亘萬古 :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치니)  

태산고절포은공(泰山高節圃隱公 : 태산같은 고절의 포은공일세.)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1919) 

조선 제26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863년∼1907년이다.  

 

 

위충대절광우주(危忠大節光宇宙 : 높은 충성 큰 절의가 우주에 빛나니)

 

오도동방뢰유공(吾道東方賴有公 : 동방의 오도는 공에게 힘입었네.)

 

임고서원은행나무 (臨皐書院銀杏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161)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5.95m에 이른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나무가 자라나는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본래 이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성역화사업의 일환으로 개성의 선죽교를 실측하여 그 규모대로 이곳에 가설(架設)하고

 한석봉(韓石峯)이 쓴 선죽교(善竹橋) 돌비석 또한 탁본하여 세우게 되었다.

 

선죽교란?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이다.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으며,

919년 고려 태조가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이다.

선죽교는 김잠곡(金潛谷)의 〈송도구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말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 의해 이곳에서 철퇴를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 유명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鄭好仁)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별교(別橋)를 세워 보호했다.

또 선죽교의 석재(石材) 중에는 부근 묘각사(妙覺寺)에서 나온 다라니당(陀羅尼幢) 일부가 끼어 있다.

다리 동쪽에는 선죽교라는 3자가 한호(韓濩)의 글씨로 씌어진 비가 있고,

 다리 서쪽에는 비각(碑閣) 안에 1740년(영조 16) 어제어필의 포충비(褒忠碑)와

1872년(고종 9) 어제어필의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또 부근에는 1641년(인조 19)에 부임한 유수 목서흠(睦敍欽)이 건립한 읍비(泣碑)가 비각 안에 있는데

 여기에는 "一大忠義萬古綱常"이라 새겨져 있다.

 이 읍비 앞에는 1797년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찬한 녹사비(錄事碑)와

1824년(순조 24) 유수 이용수(李龍秀)가 찬하고 신위(申緯)가 쓴 녹사비도 있다.

 

 

단심가 [丹心歌]정몽주 시조 고려말 정몽주(鄭夢周:1337~92)가 지은 시조.

 

조선 제3대 태종이 된 이방원의 〈하여가 何如歌〉에 답해 지은 것으로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노래이다.

방원은 정몽주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는 일에 가담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여가〉를 지어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고 유혹했으나

 

 정몽주는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라고 받아치며 유혹을 뿌리쳤다 한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다양하고 묘미있는 표현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노래는 조선의 개국과정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대변했으나,

 개국 후에는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회개혁보다는 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노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포은집〉·〈해동악부〉 등에는 한역시가 실려 있으며,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의 각 이본 및 그밖의 많은 책에 실려 있다.

 

 

 

 

계현재는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50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표지판뒤)

 포은선생의 선고이신 휘 운관공(云瓘公)의 제향을 모시는 재실이다.

숙종조에 후손 익이 삼도통제사에 부임하였을 때 임고서원 내 별고(別庫)를 두어 묘제향사를 올리다가

1751년에 후손 찬술공이 어영대장총계사 때에 쌀 40석을 출연하여 일성군 재사를 별묘(別廟=계현재)로 지어 묘제로 봉향하게 되었다. 그 후 기존 재실이 퇴락하여 재건축이 불가피하여 종약원에서는 11평의 건물을 철거하고

 대지 385평을 매입 정지한 후 전통한식 목조 한옥 17.64평, 삼문 2.04평, 화장실 4.56평, 담장, 석축 등을

 문화재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아 종약원 자체자금 3억9천70만원으로 2005.10.25일 준공하였다.

 

 

 

 

전망대에서 아래로 보면 보이는  조옹대와 용연

 

포은(圃隱) 선생은 호수의 물고기를 보며 연비어약(鳶飛魚躍)을 말씀하셨으며,

 여헌(旅軒) 선생은 임고서원 중건상량문에서 ‘조옹(釣翁)이라는 대(臺)가

 시냇가에 있는 것은 아마도 은거하신 초지(初志)일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은 포은 선생께서 낚시를 즐겼다 하여 조옹대(釣翁臺)라 부르고,

또 선생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용(龍)이라고 하여 조룡대(釣龍臺)라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연못은 용연(龍淵)이라 불렀는데 이번에 복원을 하고 울진 금강송 아래 자라던 토종 잉어를 분양받아

‘금강(金剛)’이라 이름 지은 뜻은 포은 선생의 시 「호중관어(湖中觀魚)」의

 ‘모든 것이 팔팔한 고기와 같네[物物眞成潑潑魚].’에서 찾으리라.

 

전망대에서 내려와 두갈래의 길이 있다

한쪽은 임고서원내려가는길이고 또 가른 한쪽은 임고초등학교쪽으로 갈수있는 길이다.

산책하기에 딱 알맞은 정도의 거리인듯하다.

 

 

 

임고서원에서 수련생들을 위한 숙소로 한옥건물이 있는데

나무의 향이 좋아서

햇볕만 좋다면 마루에 앉아 있음 딱 좋겠더라는..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초상화로 알려진 작품은 1390년(공양왕 2)에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녹봉될 때 그려진 공신도상(功臣圖像)이라고 하나, 현전하는 작품은 모두 그 후대에 이모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중 가장 오래된 초상화는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된 인조기사모본정몽주영정(仁祖己巳摹本鄭夢周影幀)으로 정몽주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세 점이 소장되어 있다.

 

임고서원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 

054-330-6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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