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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에 복수초와 산수유 . 매화꽃이 나를 반기네

전라도

by 화천비타민나무 2015. 3. 1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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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에 복수초와 산수유 . 매화꽃이 나를 반기네

중요민속자료 제8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 (柳爾胄)가 세운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 (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 (歸晩) 이라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 (歸晩窩) 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에서 따온 글 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있다.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金龜沒泥), 금환락지 (金環落地), 오보교취 (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 (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운조루에는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아랫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 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의 누 마루는 남아 있지 아니하다. 현재 이 집은 건 평 129평 으로 一 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 자형의 사랑채와 ㄷ 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집에있는 목독(나무로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본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http://unjoru.com  운조루 홈페이지에서 퍼옴

구례 산수유꽃을 보러가기에 지금이 적기이지 않을까?

이번주말부터 산수유꽃축제가 열리니까~

 

 

 

운조루 건물과 가옥구조
운조루 건물
 
민속자료로 지정된 '운조루'는 조선시대 대군들이 집을 지을수 있는 칸수 60칸을 넘겨 99칸짜리 집을 지은탓으로 다른 흑심이 있는 집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집 주인은 집을 짓기전에 이미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가 풀렸지만 뒷날 사람들은 "99칸집을 지어 반심(反心)을 품은 탓으로 귀양살이까지 했다"는 구전을 만들었다.

집을 지은 12년만에 그의 양자 아들에게 넘겨준 ≪長子區處記≫ (장자구처기)에는 이집이 78칸 집이었으나 불이나 줄행랑채(5칸) 안사랑(4칸) 남쪽행랑(4칸) 서쪽협랑(3칸) 중외사채(3칸) 아랫외사채(4칸) 협문과 중문(2칸)이 타고 다시 복구도 하고 손질도 하여 지금 남아 있는 칸수는 모두 73칸 129평이다. 담장의 길이가 동서로 165자, 남북으로 156자로 모두 710평의 집터이다.

크게 나눠 안채, 사랑채, 행낭채, 제실로 나눌수 있다. 사랑채는 큰사랑, 아랫사랑채로 나뉘고 주인은 큰사랑채에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손님을 재웠다. 큰사랑채 서쪽에 세 방향이 툭트인 누마루가 있어서 여름거처로 쓰였다. 이 사랑채에 二山樓(이산루) 足閒亭(족한정) 雲鳥樓(운조루) 歸晩窩(귀만와) 등 현판이 걸려있다.

큰사랑채에 잇대 ㄱ자형으로 대문쪽으로 뻗은 아랫사랑채에도 누마루가 있고 이곳을 歸來停(귀래정)이라 한다. 아랫사랑채는 弄月軒(농월헌)이라고도 했다. 안채는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안주인이 거처하며 자식들과 며느리가 산다. 부엌과 찬칸, 곡간, 대청들이 자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행낭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마굿간 등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 대문 동쪽으로 작은문이 있어서 옛날에는 안주인이 출입했다.

대문에는 옛날 '호랑이 머리뼈'를 걸어 두었지만 도둑 맞아 지금은 '말머리 뼈'로 대신하고 있다.
건축당시 이 행낭은 대문을 중심으로 각각 12칸씩이었으나 지금은 동쪽이 11칸, 서쪽이 7칸만 남아 있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다. 옛날에는 신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대문 밖에 2백평 가량의 연못터가 있다.

순천대학 박익수 교수는 이집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안채는 일반 민간집의 구조이면서 사랑채는 누마루 중심의 궁전주택 영향을 입었다.
② 행낭채가 25칸이나 되는 일자형으로 궁전주택 영향을 입은 것 같다.
③ 사랑채와 안채의 출입문을 따로 두었다.
④ 집의 규모에 비해 장식적인 의장이 적다.

누워있는 지게도 일부러 세워본다..

지게작대기..

 

 

 

 

 

 

 

 

 

 

 

 

 

 

 

 

 

 

 

 

 

 

 

 

 

http://unjoru.com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

061-781-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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