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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이란 누구인가?기생의 발생과 변천 말하는 꽃 기생이야기 [가미加味]/대구여행

경상도

by 화천비타민나무 2013. 12. 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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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이란 누구인가?기생의 발생과 변천 말하는 꽃 기생이야기 [가미加味]/대구여행

 

대구에서 유일하게 요정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가미

902년 가정집을 개조해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시작했으며 1986년부터 가미로 이름을 변경했다.

 

대구근대로의 골목여행을 하다 보면 각각의 골목마다 특색이 있고 테마가 있다.

 

기생의 거리 종로 대구 종로는 기생의 거리로 유명했다. 대구 읍성이 무너진 뒤 대구의 중심 통로로서 기능을

점차 잃어 갔지만 대신 종로에서 향촌동에 이르는 거리에는 요정들이 들어와 대구의 밤 문화를 지배했다.

한때 대구가 요정도시로 불린 배경은 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04년 경부 철도 건설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대구로 몰려 들면서 대구역 근처에 달성관 .명석.화월.대화.대판옥.자유사.

야상옥. 동경관 등 요릿집이 생겨났다. 이후. 1909년 4월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은 생업을 위해 대구기생조합을 설립 

요릿집으로 나가 예악을 팔았다. 

이후 대구권번.달성권번이 설립돼 기생들의 교육.알선.관리. 화대징수를 맡았다. 

  

 

1980년대 이후 요정시대는 저물었고 현재는 요정 "가미" (대구시 중구 종로 1가 )가 유일하게 명맥을 잇고 있다.

가미 입구에는 일제 시대부터 60년대. 70년대.80년대 까지

대구의 밤을 밝혔던 130여개 요정의 미니어처가 전시되어 있다.

각 요정마다 시대별로 푸른 전구,붉은 전구.흰전구로 구별해 100년 요정사를 한눈에 볼수 있게 했다.

 

 

가미에서 기생이란 누구인지? 기생의 발생과 변천사

말하는 꽃 기생이야기를 읽고 나니..여자의 일생이....

다시 한번 이시대에 태어난걸 감사하게 생각하며...

 

 

대구 기생의 변천사에 대해서는 계명대 김중순 교수가 쓴 논문 근대화의 담지자 기생 -

 대구지역 문화콘텐츠로서의 기능성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했던 기생 앵무 염농산은 당시 100원(현재가치 1억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이후 대구·경북권 기생 다수가 동참했

으며, 서울과 평양, 부산, 황해도, 함경도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도화선이 됐다.

 

 

아직도 성업중이라는 가미

한낮에는 기생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역사관역할을 한다.

 

 

수십년 전의 가미와 현재의 가미 ?

 

 

가미에서 눈여겨 볼것은 방방 마다 있는 전화기

 

 

 

 

 

 

 

기생이란?

일종의 사치노예(奢侈奴隷)라고 할 수 있으며, ‘기녀(妓女)’,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 또는 ‘화류계 여자(花柳界女子)’라고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기생이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양수척은 곧 유기장(柳器匠)으로서,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들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도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후에 이들이 남녀노비로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기(妓)와 비(婢)는 원래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중 비가 기보다 먼저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비나 기는 한 사회의 계급 분화과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생 [妓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구 기생 이야기

- 기생이나 기생만이 아닌 대구삼절 앵무·비취
- 인간문화재 박녹주

   

앵무(鸚鵡)는 경상감영(현재 경상감영공원) 교방 소속의 관기였다. 경상감사 이천보(李天寶) 등과 만리장성을 쌓았고, 후의를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어느날 이천보가 경상감영의 어린 기생들을 불러 등왕각서(王閣序: 중국 장시성의 유명한 누각인 등왕각 연회때 지어진 글)를 외우게 했다. 앵무 차례가 됐다. '물화(物華)는 천보(天寶)'란 구절에 이르러 앵무는 '물화는 사또(使道·경상감사)'라 고쳐 읽었다. 놀라운 기지였다. 이천보가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앵무에 대한 기록은 한국기생 연구의 물꼬를 텄던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 일부가 언급돼 있다.

앵무의 동생 비취(翡翠)도 이름난 기생이었다. 서울의 행세깨나 하는 위인들은 "언제 한번 앵무·비취와 멋지게 놀아볼까"하며 두 기생을 흠모했다고 한다.

앵무와 비취는 단순한 기생이 아니었다. 서상돈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에 이들 자매는 네번 째로 기금을 낸 것으로 돼 있다. 앵무는 평소 후배들한테 "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 섬겨선 안 된다.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대구삼절'(大邱三絶: 석재 서병오, 달성공원, 앵무·비취)에 이들이 들어간 게 우연이 아니다.

박녹주(朴綠珠·1905∼1979·사진)는 예인 기생이었다. 젊어 한때 명기(名妓)로 이름을 날렸고, 훗날 판소리 동편제로 인간문화재가 됐다. 일제시대엔 영남이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봄봄' 등을 쓴 작가 김유정과의 목숨 건 짝사랑 스토리는 처연하고 저릿하다.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역사 속 대구 기생들은 기생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무너뜨린다. 최근 대구지역에서 기생과 요정 이야기를 자원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례적인 현상이다.

호사가들은 국내 3대 기향으로 서울, 평양, 대구를 꼽으면서도 대구 기생이 가장 속이 깊다고 얘기한다. 서울 기생은 "그 사람 돈 제대로 벌 줄 아나?"하며 능력을 중시하고, 평양기생은 "그 사람 돈 있나?" 하고 재물로 사람을 재지만, 대구 기생은 "그 사람 마음 좋은가?"하고 심성을 가려 상대를 했다는 것이다.

영남대로가 대구 기생을 다시 보게 만든다.

 

담배의 역사

어릴때 오빠들이 솔담배 종이로 다양한 걸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시절 오빠들의 담배 냄새 무척이나 싫었었는데

지금은 다행이 담배를 끊었다.

 

이제 한사람만 더 담배를 끊어주면 좋을텐데......

 

 

 

 

 

가미의 현재 밤 모습이 어떨지 잠깐 상상해 본다..

하지만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는....

그냥 드라마나 영화속에서나 나올듯한.. 그런 분위기?

 

 

가미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마당한켠에 태양의 빛을 보기 위해 솟아 있는 나무

겹겹이 둘려쳐진 지붕이 마당을 덮고 있는데 나무 두그루가 빼꼼이 지붕위로 올라가

바깥 세상을 살피는듯하다.

 

시대의 삶..

말하는 꽃 기생의 이야기~

대구에서 만난 가미는

대구기생 앵무를 알게 했고

대구의 기생역사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알수있게 해주었다.

기생의 삶을 살았지만 한시대를 풍미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한 여인의 마음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한번쯤 대구 기생 앵무에 대해서 검색하고 그녀의 삶을 찾아 읽어 보는건 어떨까?

 

 

가미에 대한 나의 바램?

역사관.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할수있게 운영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미

대구 중구 성내2동

053-254-6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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