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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여행]순례자의 편안 휴식과 안식처 배론성지/ 최양업신부

충청도

by 화천비타민나무 2013. 10. 1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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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舟論)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1,087m)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습니다.

이곳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전에 배론은 6개 마을로, 즉 아랫배론, 중땀배론, 웃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비득재 마을이 있었으며, 70여호가 있었다고 합니다.

종교를 떠나서 성지순례하듯 배론성지를 잠시만 둘러봐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이유는?

 

 

 

1831년에 설정된 조선 교구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가장 큰 목표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여 이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1836년 먼저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 배론 신학교(1855-1866년, 주보성인 성요셉) 설립자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 직무대행 메스트로 신부는 1855년에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메스트로 신부는 1808년 프랑스 앙트르몽에서 태어나 1832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839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이듬해 마카오에 가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10년간의 모험 끝에 1852년 8월17일 중국 배를 타고 서해안 고군산도에 상륙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1853년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사하자 1856년 3월27일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도착 할 때까지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메스트로 신부는 1857년 12월30일 과로로 쓰러져 선종 할때까지 배론 신학교 설립 외에도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는 등 착하고 순한 성격으로 최양업 신부와 많은 조선의 신자들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861년 10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님은 신학교를 성요셉 신학교라고 하였다.

 

 

 

 

 

최양업신부 기념성당(대성당, 소성당)의 의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다.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서 2000년기의 세기말적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삼천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다.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하였다.


 

1. 생애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다. 최양업은 16살이 되는 해에 이 곳 수리산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 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http://www.baeron.or.kr     홈페이지 발췌

 

 

 

 

배론성지로 가기전에 한번 쯤..배론성지의 홈페이지를 먼저 보고 찾아가 보는건 어떨까? 싶다.

사실 이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몇번이고 있었는데~

아무 정보 없이 느닷없이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홈페이지 한번 검색해 보고 들러본다면

도움이 많이 될것 같다.

 http://www.baeron.or.kr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043-651-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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