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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여행]서계 박세당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했던 궤산정과 박세당 사랑채 ,노강서원을 가다.

서울.경기

by 화천비타민나무 2014. 1. 4.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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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여행]서계 박세당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했던 궤산정과 박세당 사랑채, 노강서원을 가다.

조선 중기 실학자이자 석학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 선생님의 사랑채에서

그윽한 녹차 한잔을 마시는 귀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서계 박세당 사랑채는 고택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2000.4.17) 로서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에 위치해 있다.

수락산을 오가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지나쳐 갔을텐데 아마도 고택에 직접 들러본 분들은 많지 않을듯하다.

이른 아침 의정부여행에서 가장 먼저 가본곳이 이곳 서계 박세당 선생님의 사랑채이다.

주말 이른아침 수락산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다반사이다.

나는 산보다는 이곳 고택에서의 그윽한 차 한잔을 선택해 본다.

하얀색 창호지에 따뜻한 조명이 내려앉아 있는 곳에서의 차한잔의 여유~ 

얼마만에 누려보는 행복인지^ 

 

서계 박세당 선생님의 사랑채는 조만간 고택체험을 할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식과 함께 내어준 녹차 한잔은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귀한 선물이었다.

 

 

뽀드득 거리는 하얀 눈위를 정신없이 걸어본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먼저 반기는 곳이었다.

옆집에 사는 멍멍이들이 낯선사람들의 방문에

컹컹짖어댄다.

우리처럼 일찍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이 않았을 터..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에게 꼬리를 흔들어 주던 녀석들이

하얀 눈위에 어지러이 만들어놓은 발자국 주인임을 알수 있다.

 

 

 

 사백여 년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 받고 있었다.

이곳 서계 박세당 선생님의 사랑채와 궤산정

조금만 더 잘 보수되고 관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계 박세당 사랑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2000.4.17)

장암동 197번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2000. 4.17) 이 가옥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西溪)선생은 1629년(인조 7년)에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朴炡)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태어났다.

31세인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배치로서 집 앞 어귀에 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학당터 및 그 뒤의 영당과 묘택 등의 일곽이 조선후기 사대부 건축의 모습을 잘반영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교육적, 문화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전란 당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 사랑채만원형을 유지하여 남아 있고 나머지 건물은 부분적으로 현대식의 건물이 세워져 후손들이 살림을 하고 있어 전체적인 가옥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한편, 99년 8월에 경기도 전통종가로 지정됐고, 2000. 4.17일에 사랑채가 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됐다.

 

 

 처마에 고드름이라도 열리면 정말 장관이겠다.

 

 

 

 

한지가 주는 따뜻함에 조명을 더하니

그 아래에서 마시는 차한잔은 더없이 따뜻하다.

 

 

차한잔을 마시고 다시 노강서원으로 향했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좋은 곳에서 대접받은 차한잔

감사합니다^^

 

 

조만간 이곳에 고택체험을 한다고 하니.

편안한 잠을 잘수도 있겠네요~

기대되는 곳입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꼭 한번 고택 체험은 해보시는게 좋죠

 

 

박세당 사랑채를 나와 인사를 하고 다시 노강서원으로 향해 길을 나서본다.

사랑채옆에서 흐르는 계곡이 있는데

그곳엔 궤산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궤산정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쓰럽게 했다.

조금만 더 당당하게 굳건하게 있으면 좋으련만

너무 애처롭게 서있는 모습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지못미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궤산정

 

조선 중기 실학자이자 석학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 선생이 이 근방에 칩거하면서 여러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라고 쓰여 있다. 박세당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등의 벼슬을 하다가 조정의 당쟁에 실망하여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그는 학문 연구만이 아니라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의 학풍을 이룩했고 <색경>이라는 농사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다. <서계집> <사변록> 등의 저술로 실학의 토대를 마련한 업적을 남겨 사후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지금의 행정구역상 의정부시 석천동인 수락산 입구 일대에는 그가 기거하던 고택과 제자를 가르치던 서원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제자들과 둘러앉아 담론을 주고받던 정자는 돌보지 않아서 쓰러질 것 같다. 한자로 삼태기 '궤' 자를 쓰는 궤산정의 이름에는 “아홉길 높이의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교훈적인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90% 이상을 달성해 놓고도 끝마무리를 잘못해 망치고 마는 사례가 적지 않다. 궤산정은 그런 경우를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청풍정 유지

청풍정은 서계 박세당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배정하기 위하여 충렬사를 짓고

그 앞에 정자를 지어 유생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지금은 주초만 남아 있다.

충렬사는 현재 노강서원이 있는 자리이다.

 

 

청풍정기원문(淸風亭記原文)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청절사(淸節祠)의 아래요 풍천대(風千臺) 위에 네 칸의 정자가 있어 이름을 청풍(淸風)이라 하였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느냐하였다. 天地에 부는 기운을 天風이라하고 바람소리 이는 것을 人風이라하니 天風이 이르는 곳에 모든 풀이 다 쓰러지고 人風이 닥치는 곳에 어진 마음이 생기는 고로 孟子는 백이(伯夷)의 풍을 받는 사람은 완악(頑惡)한 사람이 청렴(淸廉)하여지고 나약(懦弱)한 사람이 뜻을 세우게 되니 성인(聖人)의 맑음을 얻은 사람은 백이(伯夷)라고 하였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백이(伯夷)의 맑음을 얻은 선생이나, 신동(神童)으로 世宗 때 태어나 世祖가 왕이 되자 세상에 뜻이 없어 총림(叢林) 속에 은둔(隱遁)하여 홀로 맑은 절개를 지켜 세상(世上)에 가르침을 심어주시니 청한(淸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생의 호(號)이며, 청간(淸簡)이라 하는 것은 조정에서 내리신 시호(諡號)이니 선생의 덕이 시종(始終) 맑음이 글월마다 밝혀있다.

 

 

 

노강서원

경기도 기념물 제41호(1977.10.13)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6-1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41호 이 서원은 조선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 폐출을 죽음으로써 간언하였던 정재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뜻을 기리고, 지방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하여 숙종 21년에 서울 노량진에 건립한 서원이다.

본래는 풍계사였으나 숙종 23년에 조윤벽 등의 간청으로

노강이라고 사액받았다.

영조 30년(1754)에 다시 지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당시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박태보는 서계 박세당의 둘째아들로 숙중 3년(1677)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간 뒤 숙종 15년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 20년에 모든 죄를 사면받고 그의 충절을 기려 이조판서로 벼슬을 올려받게 되었다. 지금 건물은 1969년에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옮기면서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청절사의 터에 다시 지은 것으로 맞배지붕의 사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의정부 여행에 문화해설을 해주신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네요

 

 

 

 

수락산을 산행하시는 분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시면 어떨까요?

 

 

이렇게 서원을 만나고 고택을 다녀오면 저절로 역사 공부를 하게 된다.

얼마만에 역사를 되집어 보는 것인지..

이러니 여행이 어찌 좋치 아니한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이 있음에 걷고 또 걸어 정상에 오른다고하니

정상을 오르기 전에  주변을 더 헤아려 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박세당 사랑채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노강서원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 031-828-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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