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성여행]소원을 빌면 이루어 질것 같은 미리내 성지

서울.경기

by 화천비타민나무 2012. 3. 22. 00:30

본문

반응형

소원을 품은.. 촛불 하나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일부러 꺼 놓은 듯한 촛불도 있었는데요~

제가 도착해서 꺼진불도 다시 보듯.. 다..촛불을 밝혀놓았습니다.

잘 못한걸까요~

설마 일부러 몇개 꺼 두신건 아니겠죠~

바람에 꺼진 걸꺼야..

안성에 도착해서 미리내 성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미리내 성지가 뭔지도 몰랐었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지요~

역시 가보고 나니..아.. 여기가 이런곳이구나..

또 하나를 배우고 옵니다.

 

 

어느곳을 가도..촛불이라는 것은.. 늘.. 하늘하늘거리면서 꺼질듯해도

다시 일렁이며 불을 밝히고.. 그렇게..촛불을 바라보면..소망과 함께 초랑 같이 타는것 같습니다.

나른한 오후.. 이제 제법 봄이 가까이 왔는지..이곳을 걸으면서.. 춥다..보다는.. 아..시원하다........

마치 가을이 옆에 있는듯 느껴졌지 뭐예요~

 

 

천주교는 가끔.. 일부러 찾아가지 않지만.. 어느 지역을 가던..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가는 곳의 멋진 성당이 있으면 찾게되더라구요~

그리곤 살며시.. 성당안을 들어가 보기도 하구요~

이곳 미리내 성지에 있는 성당은 내부에 문이 잠겨 있어서 조금 아쉬웠어요~

규모도 꽤 크던데..

 

미리내 성지 입구입니다.

이곳에서 차를 주차 시키고 걸어가야해요~

그리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요즘 처럼 차로 빙빙 다니는 사람들에겐..썩.. 짧게 느껴지지 않을정도의 거리.. 

딱..걷기엔 알맞은 거리인것 같아요~ 한 삼십여분정도 더 둘러보고 온듯했으니까요

한바퀴 둘러 보고 나오면 약 2키로 정도 될것 같아요~

미리내 성지 잔디밭을 한바퀴 돌아 보는 것 까지 하면요~

더 될까..

그런데 요즘 이렇게라도 산책하지 않으면

정말 운동부족으로.. 살만 포동포동오르고..

 

 

미리내 성지의 새로 만들어진 건물보다는 여기 보이는 건물이 더 마음이 편안해 지던데요~

 

미리내 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時宮山 515m, 神仙峰으로도 전해짐)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이고,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우리말 ‘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우리의 옛 지명이다.

 

꽤 넓은 잔디밭이 보이죠~

꼭 종교가 천주교가 아니더라도..누구나 들어가도 되고..

 맞이해 주는 곳이니까요~

계절마다..

철철이 바뀌는 이곳의 모습을 담기위해

사진 찍으시는 분들이 많이 오신다고 하네요~

가을쯤이.. 정말 멋질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봄에는 꽃이 필테고..

가을엔..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단풍을 보러 이곳이 다시 한번 갈까 합니다.

 

 

종교적인 힘때문일까요~

이곳을 돌아 보는 내내.. 경건해지는 마음은..

그런 힘 때문이겠죠~

 

 

 

봄맞이 나물을 채취 하시는 분들이 종종 눈에 보이더라구요~

잠시나마 밀레의 만종을 연출해 주셨는데..

미처.. 담아내질 못했어요~ ㅋㅋㅋ

 

 

 

최초의 한국인 신부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분으로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 보명은 지식. 관명은 대건입니다

 

김대건은 1821년 (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장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이곳 미리내 교우촌 신자들의 손길로 가꾸어져 오다가,

초대 본당신부가 부임한 후 미사를 올리며 정성껏 묘역을 돌보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886년에는 교황청 시복 판사인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고,

1901년 5월 에는 순교자의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신학교 성당의 유해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9월 경남 밀양 성당으로 잠시 옮겨져 안치되었고,

1951년에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로, 1960년 7월 5일 혜화동 가톨릭대학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리내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과 발뼈 및 관조각의 일부가 보존되어 오다가,

 한국순교복자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안치되어,

성지 순례자들에게 참배 현양과 친구의 큰 선물을 안기고 있다.

또한 미리내 성지에는 병인박해의 순교자 <이윤일 요한 성인>과

미리내 인근 교우촌 부근에 매장되어 방치되어 오던 16인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도 1976년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경당내부입니다.

방금 누군가가 다녀가셨어요~

한쪽에 꽃다발이.. 놓여져 있더라구요..

 

 

마침 이곳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분이 이곳을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잠시 안내받고 왔답니다.

 

 

 

 

http://www.mirinai.or.kr 

미리내 성지 홈페이지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